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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CRITICS

수인선 水仁線 Suin Railroad

 

어디에나 있는, 그러나 어디에도 없는 우리 안의 수인선

박석태(미술비평)

 

아무도 가려 하지 않았다. / 아무도 간 사람이 없었다. // 처음엔 바람이 비탈길을 깎아 흙먼지를 풀풀 날리었다. / 하늘을 깎고 어둠을 깎고 눈(雪)의 살을 깎는 소리가 떨어졌다. / 산도 숲속에 숨어 있었다. / 얼음도 깎인 벼의 밑둥을 붙잡고 놓지 않았다. / 매 한 마리가 산까치를 움켜잡고 하늘 깊숙이 파묻혔다. / 얼음장 위로 얼굴을 내밀었던 은빛 햇살도 사라졌다. / 묘지에 서로 모여 갈대가 울었다. 그 속으로 눈발이 힘없이 쓰러졌다. / 어둠이 하얗게 질린 얼굴로 사위어 있었다. / 뒤엉켜 죽은 망초꽃들이 휘익휘익 공중에서 말하고 지나갔다. / ‘그것봐’ ‘그것봐’ / 황토빛 자갈이 주르르 넘어졌다. 구르고 지난 자리마다 사정없이 눈(雪)이 꽂혔다. - 기형도, <사강리(沙江里)>

 

 

수인선 1

멋도 모르고 부모님 손에 이끌려 그대로 주저앉아 살게 된 인천. 인천은 우리 가족이 살던 서울 구로동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신기하게도 그곳처럼 먼지로 뒤덮인 회색 벽이 있었고, 집 앞에는 부지런히 흰 연기를 내뿜는 공장 굴뚝이 있었고, 어른들이 타박하던 우리들의 좁다란 골목이 있었다. 그리고 그저 텅 비어 있어 늘 나른하게 보이는 공터가 있는 것도 같았다. 하지만 어느 날 찾은 소래는 달랐다. 그곳은 황량한 노란색과 빛바랜 회색, 그리고 펄 속의 이름 모를 식물들이 내뿜는 기묘한 붉은색으로 내 기억에 남아 있다. 볕이 아찔하도록 좋았던 어느 여름날, 어린 눈에도 좁아 보이는 궤도를 비틀거리듯 느릿느릿 무거운 몸짓으로 어슬렁거리던 꼬마 열차가 있었다. 회색빛 바닷물이 개울처럼 흐르는 낡은 철교 위에서 사람들이 느릿한 열차를 피해 종종걸음을 쳤다. 나는 “저 열차에 치어도 사람이 죽을까.”라고 생각했던 것 같다. 어느 곳이 목적지였는지는 기억에 없다. 기차를 기다리곤 했던 소래역과 송도역에서 풍기던 진득하고 저릿한 짠내는 지금도 그곳의 기표로 나에게 남아 있다. 이제야 그것이 고단해서 짜디 짤 수밖에 없는, 우리네 삶을 닮은 젓갈의 냄새였음을 안다. 그렇게 나와 수인선의 기나긴 인연은 시작되었다.

 

 

수인선 2

지형이 호랑이의 아가리처럼 생겼다고 이름 붙여진 호구포. 그곳에 ‘새로 만든 수인선’ 역 중의 하나가 들어섰다. 내가 호구포역 근처로 이사한 때는 서른이 넘어서였다. 복선화가 됐다는 수인선은 역시나 황량했다. 해질녘이면 저 멀리 타는 듯한 서쪽 하늘을 배경으로 송도신도시의 실루엣이 유령처럼 다가왔다. 이제 막 지은 집 특유의 역한 냄새가 점령한 임대아파트 14층에서 내려다보이는 호구포는, 냄새 나는 물가에 아무렇게나 막 자란 풀들과 그 누추함을 있는 힘 다해 감추려는 듯한 근린공원의 반듯함이 기묘하게 공존하고 있었다. 그곳에 포구가 있었다는 사실은 간신히 역사(驛舍)의 네온 간판을 통해 유추할 수 있을 뿐이었고, 실은 수인선 어느 곳에서나 대면하게 되는 획일적인 부조화와 그로 인한 생경함만 가득했다.

촌스러운 ‘남동공단역’이 아니라 국제적 품격을 지닌 이름인 ‘남동인더스파크역’ 쪽에서 바람이라도 불라치면 시큼함과 매캐함이 섞인 냄새가 아파트 창틈으로 스멀스멀 비집고 들어왔다. 냄새라면 남동공단의 그것과 품격 있는 남동인더스파크의 그것이 다르지 않았다. 4년의 임대기간 동안 나는 ‘여전히’ 공사 중인 수인선을 오고가는 전동차에 몸을 싣고 남동공단을 지나 원인재와 연수를 거친 후 송도역에서 내려 일터가 있는 인천역 부근까지 버스로 이동하고는 했다. 마침내 지금은 공사가 끝났으므로 인천역에 이르는 철길까지 우리는 수인선이라고 부를 수 있다. 그곳에 계속 살고 있었다면 버스 따위는 타지 않았으리라.

 

 

고정남, 그리고 수인선

고정남의 《수인선》 시리즈를 대했을 때, 나는 그의 사진들이 전해주는 이미지에 집중하기보다 거기서 풍기는 듯한 냄새에 먼저 반응했다. 예전에 알던 젓갈의 비릿한 냄새도, 개펄의 짠내도 아니었다. 뙤약볕이 한창이던 시골역사 한켠에 구부정하게 서 있던 수양버들 그늘이 발산하던 싱그러운 냄새도 아니었다. 그의 사진 <야목역>의 덤프트럭이 지날 때마다 바람에 풀풀 날리는 바싹 마른 먼지 냄새였고, 고색역과 봉담역을 찍은 사진이 담고 있는 축축한 콘크리트 내음이었다. 허나 사실 이 냄새는 딱히 수인선과 맞닿아 있지는 않다. 지금, 여기에 살고 있는 사람이라면 익숙하다 못해 친근한, ‘건설’ 이미지의 후각적 표징일 것이다. 그러므로 그의 사진에서 풍기는 냄새는 우리에게 보편적이다. 한때 아낙들이 건져 올렸을 조개 같이 비릿한 것들은 이제 트럭의 억센 바퀴 밑에서 산산조각이 나고(<야목역>), 어천역 주변에 뒹구는 이정표에 새겨진 ‘반월’ 지명도 처연하다. 그뿐인가. 송도역 한편에 오래도록 방치되었음이 분명한 물탱크 혹은 기름탱크는 이미 식물의 왕성한 생명력을 과시하는 장으로 변화한 지 오래다. 새로운 노선을 만들었으므로 이제 더 이상 쓰이지 않는 야목역의 교각과 철교는 폐사지처럼 허허로운데, 저 멀리 효율적인 용적률을 자랑하는 대규모의 고층아파트단지와 묘한 대비를 이루고 있다. 그의 카메라는 물끄러미 그런 광경을 담아낼 뿐이다. 그와 같은 걸 느끼라고 강요하지 않는다, 다만 제시할 뿐.

 

 

고정남, 수인선, 그리고 사람들

다소 건조한 이야기. 수인선은 이름대로 당연히 수원과 인천을 잇는다. 그 중간에는 안산과 시흥을 지난다. 1995년 12월을 마지막으로 운행을 중단했다가 20년 만에 다시 탄생했다. 워낙에 수인선은 일제강점기에 여주와 수원을 잇던 ‘수려선’을 통해 싣고 왔던 그 좋은 여주쌀과 소래염전에서 생산된 천일염을 인천항을 통해 일본으로 반출하기 위한 산업철도로 놓였다. 보통 철도에 비해 폭이 절반 정도였기에 협궤열차, 꼬마열차로 불렸다. 해방이 왔고, 수인선은 이제 인천과 수원 사이의 넓은 빈터, 아무 것도 없어서 황량하리만치 넓었던 경기 남부의 소도시들을 관통하며 도시의 느린 변화를 바라보았다. 바야흐로 사람을 실어 나르는, 하여 사람들의 질펀한 이야기가 꽃을 피우는 수인선의 이야기가 시작되었다. 길이 있는 곳에 어찌 사람의 이야기가 빠질 수 있을까. 고정남의 카메라는 그런 사람들의 이야기로 시선을 옮긴다. 그것도 수인선의 역사가 베인 사람들의 이야기다. 그래서 그의 사진에 등장하는 인물들은 그대로 《수인선》 이야기의 한 부분이 된다. <신포역>에 등장하는 중년의 남성은 적산가옥으로 보이는 일본식 집을 배경으로 하고 있다. 집 앞에는 이제 공사를 막 시작하려는지 건설자재와 중장비가 보인다. 고정남은 ‘신포역’이라는 역사의 이름을 소환하는 동시에 한 남성의 모습을 중첩시킴으로써 우리에게 근대는 무엇인가라는 질문을 던지는지도 모른다. <신포역>의 또 다른 사진 한 장. 중학생쯤으로 보이는 소녀가 강아지를 안고 엷은 미소를 띤 채 카메라를 응시한다. 오래되어 원래의 구조가 바뀌기에 이른 세월의 더께와 싱그러운 미소를 보이는 소녀의 극적 대비가 오히려 심상하다. 그런 식이다. 그는 그저 제시한다.

 

<인천역>에 포착된 중년 남성 옆에 놓인 짐수레에는 ‘일본통운(日本通運)’ 로고가 선명하다. 이를 통해 인천역의 역사적 맥락을 자연스레 보여줄 뿐이다. 그러므로 ‘중년 남성의 초상’은 ‘일본통운’이라는 기호를 돕는 장치로 작용한다. <원인재역> 속 3명의 아시아계 이주노동자는 더 이상 쓰이지 않는 옛 수인선 철교의 교각과 그 밑의 무성한 잡초를 배경으로 서 있다. 마치 유명한 관광지에서 찍은 기념사진처럼 그들은 ‘성의껏’ 포즈를 취하고 있다. 지나치게 진지해서 오히려 우습지만, 이 역시 수인선을 오가는 사람들의 삶임을 우리는 알고 있다.

그 밖에도 수인선을 따라 농사짓는 사람들이 갑자기 툭툭 튀어나오곤 하는데, <어천역>의 젊은 도시농부가 그렇고, <월곶역>의 노인과 부부들이 그렇다. 수인선 특유의 산업화된 모습과 전통적 생활방식이 혼재된 모습은 그대로 우리 사회의 단편으로 보인다. 고정남은 그들을 아무런 편견 없이 담아낸다.

 

고정남은 결코 ‘폼 잡지 않고’ 우리의 굴절된 근대와 급속도로 진행된 현대의 단편적인 이미지들을 수집하고 버무린다. 그렇다고 그의 사진이 만만한 것만은 아니다. 이를테면 그는 그의 역사적 인식을 보여주는 최소한의 연출을 시도하거나, 개발과 그 속에 도사린 자본의 욕망을 드러내는 장면을 선택한 사진을 제시하기도 한다. <원인재역> 중 잡초 속에 놓인 레코드판 표지는 한반도와 일본열도가 중앙에, 주변에는 ‘일본축음기상회(日本蓄音機商會)’ 지점의 현황이 인쇄되어 있다. 이는 전작인 《호남선》 시리즈에서 1921년에 발행된 호남 관광안내도를 제시한 것을 떠올리게 하는 바, ‘일본축음기상회’ 레코드판 표지를 통해 수인선 건설의 역사적 배경을 자연스레 전해준다. <사리역>에서는 농작물 재배를 위해 밭고랑에 설치한 막을 주변의 학원 현수막을 이용한 모습을 보여줌으로써 은근히 성장·경쟁 중심의 이 사회에 야유를 보내는 듯하다. 하지만 여전히 그 방식은 결코 무겁지 않다.

 

 

어디에나 있되, 어디에도 없는 풍경

고정남이 보여주는 《수인선》 시리즈는 철길과 그 주변 사람들에 대한 유쾌하지만 묵직한 일종의 시각적 보고서다. 수인선이라는 소위 ‘변두리’는 서글픈 근대의 기억과 그로 인한 집단의 욕망이 혼재되었으나, 여전히 그에 기댄 삶이 계속되고 있는 우리 사회의 축소판으로 보인다. 그것이 ‘중앙’의 세련되고 정제된 방식이 아니므로 더욱 눈에 띌 뿐이다. 서두에 인용한 기형도의 시 <사강리>의 어수선하고도 스산한 풍경이 이와 같았을까? ‘바람이 비탈길을 깎아 흙먼지를 풀풀 날리’는, ‘황토빛 자갈이 주르르 넘어’지는 서걱거리는 풍경은 오늘도 수인선 전동차 창밖에 펼쳐진다. 고정남은 그 흔한 우리의 풍경을 성실한 소요자의 시선으로 기록한다. 그러므로 기형도의 펜과 고정남의 눈을 통해 보는 수인선의 풍경은 우리 주변 어디에나 있으되, 어디에도 없다. 이제 우리도 늘 존재해 왔지만 한 번도 의미를 지녀 본 적 없는 저마다의 풍경을 만들어 봐도 좋지 않을까. 여기와 저기를 잇다가 마침내 사람의 이야기로 가득해진 좁고 느릿한 기차처럼.

하이쿠:인천사이다치바(Haiku:Incheon Cider Chiba)

사진비평_김웅기

 

고정남은 싱겁고 가벼운 사진을 심각하고 엄격하게 찍는다. 일상적으로 어디선가 누구라도 무엇이라도 좋은, 남길 만하지도 않고 별로 기념이 될 만하지도 않을 것 같은 사진을 빈틈없이 열심히 찍는다. 제목이 암시하듯 그는 자기가 살고 있는 인천의 한 지역과 일본 유학 초기 시절에 몇 달 살았던 일본 '치바(千葉)'에서 겹쳐지는 체험을 바탕으로 하이쿠(俳句) 같은 압축적이고 번쩍이는 섬광 같은 일상의 진실을 사이다(Cider) 거품처럼 가벼운 사진으로 드러내려고 했다. 일상의 경험과 사물 속에서 열일곱 자로 압축되는 절정의 시를 쓴 마츠오 바쇼(松尾芭蕉)처럼 "모습을 앞에 두고 마음은 뒤에" 두는 심심한 사진을 찍은 것이다. 텍스트를 압축적이고 상징적으로 구성하는 시와는 달리 이미지를 하나의 프레임에 중첩적이고 지표적으로 구성한 사진을 고정남은 찍은 것이다. 무의식에 녹아 있어서 하나도 새로울 것 없는 사물, 건물, 풍경, 상황 등을 찍은 그의 사진을 일본의 저명한 사진가 호소에 에이코우(細江英公)가 "초평범(Super Normal)"이라고 명명했다. 너무 평범해서 오히려 평범하지 않게 보이는 일상의 단면을 사진적으로 표현했다고 평한 것이다. 무라카미 다카시(村上隆)가 초평면(Super Flat)이라고 명명한 자신의 미술적 근거를 가츠시카 호쿠사이(葛飾北斎)의 유키요에(浮世絵)에 근거한 것과 논리적 유사성이 있지 않나 싶다. 그러나 나는 고정남의 작품을 평범이 초월적으로 특징 지워져 있는 메타-평범한 사진이라기보다는 골계를 매개로 하여 평범한 일상을 일상의 틀 안에서 일상을 변형하거나 새롭게 발견한 결과로 느꼈다. 일상을 관념적으로 대상화 시켜서 개념적으로 고찰하고 파악하기 보다는 일상을 골계, 특히 해학을 통해서 재발견하는 세계로 파악하는 것이다. 너무 당연하게 존재해서 있는 지도 모르고 지나치던 사물이나 상황이 카메라 프레임 속에서 새롭게 발견되고 인식되는 세계라는 점에서는 리얼리즘과 괘를 같이 하나, 리얼리즘이 갖는 공격성이나 비판성이 고정남의 사진에서는 거의 발견할 수가 없다. 풍자도 없다. 그냥 무심하게 따뜻하고, 차별 없이 포용적이다. 비루하고 지루한 일상 속에서 그 일상에 동화되어 있는 사람이나 사물, 풍경, 상황을 은근슬쩍 조작하고 재구성하여 자연스럽게 물에 물 탄 듯 술에 술 탄 듯 찍혀 있다. 그러나 조작과 구성을 은폐하여 이렇게 자연스럽게 보이도록 엄청난 노력과 시간을 들이며, 매우 엄격하고 엄밀하게 찍는 것이다. 하이쿠적 간결성과 단순함은 이런 태도와 노력 속에서 까마득하게 구현되는 것이다.

골계를 하나의 예술적 장치로 일찌감치 분석한 사람은 아리스토텔레스다. 그의 "시학"에서 비극만큼 체계적으로 제시하지는 않았지만 비극에 대비해서 희극을 추하고 비루한 대상을 볼 때 느끼는 기쁨으로 설명하였다. "희극은 저급한 유형의 인물들을 모방한 것이다. 우스꽝스러운 것은 마음을 아프게 하거나 파괴적이 아닌 어떤 결함이나 추함 속에 깃들어 있다"고 그는 "시학"에서 말했다. 잘난 이를 모방의 대상으로 동일시하여 간접적으로 비극을 체험하여 카타르시스를 통해 대상과의 동일시를 해소하고 분리한다는 것에 반해서, 희극은 처음부터 웃는 사람으로 하여금 웃기는 대상과 비판적인 거리를 유지하게 하여 대상을 내려다보면서 방심하게 한다. 긴장하다가 마음을 풀어놓으면서 발생하는 후련함과 통쾌함이 희극에서 골계가 주는 효과라고 한다. 이 분리와 거리가 발생시키는 소격효과로 웃기는 자는 자기를 대상화 하여 스스로를 맥락이나 구조에 비틀어진 틈 사이에서 누구나 할 수 있는 사소한 행동이 착오적으로 되어 불능화 되고 무능화된다. 베르그송은 어려운 것이 쉬운 것으로, 복잡한 것이 단순한 것으로, 강한 것이 약한 것으로 전환되면서 적응하는데 동원되면서 사용되는 에너지격차에서 잉여에너지로 방출되는 것이 웃음이라고 한다.

고정남의 사진에서 잉여의 양은 매우 적다. 드라마틱하지 않다. 사진 속 배경도, 찍히는 사람이나 사물도, 또 이것들로 구성되는 상황도 너무 사소하게 자연스러워서 한 장, 한 장 사진으로서는 그 진면목을 캐치하기가 쉽지 않다. 전시를 통하여 집적되고 배치되면서 맥락이 재구성되면서 미세한 잉여가 증폭되고 별로 사진적이지 않던 사진들이 사진적으로 보이기 시작한다. 별스럽지 않아서 찍힐 만 하지도 않고 또 딱히 사진으로 남길 이유가 없던 시시한 것들이 사진으로 재현되면서 볼 만하게 되는 것이다. 눈에 확 뜨이지는 않는데, 보고 나면 거머리처럼 기억에 흡착되어 수시로 뜬금없이 그 이미지의 상황들이 떠오른다. 그럴 때마다 풍선에 바람 빠지듯이 나는 피식거리며 실없이 웃었다.

이런 싱거움이야말로 고정남 사진의 골격이다. 무의식처럼 배치된 일상의 한 부분을 발견하여 포착하고, 스스로 그 포착된 일상으로부터 거리를 설정하고, 그 거리를 해학으로 매개하여 한 장의 사진으로 그 일상을 매우 비일상적으로 드러낸다. 그리고 비일상적인 사진들이 전시를 통해 서로 연결되어 '초'일상적인 씬(scene)으로 관객에게 제시되는 것이다. 이 싱거움을 위해서 피사체와 주관적으로 거리를 설정했어야 하며, 그 주관적 정서적 거리를 객관적 물리적 거리로 대체하기 위하여 사진 찍는 행위가 진지하고 엄밀하게 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사진적 이미지 그 자체야 사진적 프레임 속에서 완결될 수밖에 없지만 그 이미지를 있게 한 행위 그 자체는 이미지의 지시적 상황과 분리될 수가 없다. 이러한 구성적 지칭성 속에서 사물과 사물이 프레임 속의 맥락에서 미끄러지거나 어긋나면서 맹렬한 아이러니나 갑작스러운 비현실성, 웃어도 될지 모르는 공포나 슬픔에 대한 무표정, 진지한 농담이 배치된다. 표면에서 멍청하고 웃기는 상황이나 행동이 배치되면 될수록 심각하고 무거운 어떤 감정이 담기는 것이다. 그 결과 사진이 가지는 매체적 특성보다는 사진이 사용되는 방식과 그 사진이 전시되는 방식으로 표현의 중심이 이동되고, 사진이 더욱 사진 너머에 있는 이미지가 가지는 의미의 중첩성을 환유적으로 확장하여 개념적으로 드러나게 되면서 사진 아닌 사진 같은 느낌이 채워져서 사진이 시시하고 싱겁게 보이는 것이다. 사이다의 탄산 거품같이 수면 위로 떠오르는 사진인 것이다.

아리랑_호남선(Song of Arirang_Honam Railroad)

 

오래된 풍경, 사유의 이미지-사진, 여행, 산보, 수집

사진비평_최연하

이 사진집은 1921년도에 일제가 제작한 한 장의 지도로부터 시작되어 잘 익은 벼 이삭 한 줄기가 찍힌 사진으로 끝을 맺는다. 철도 노선도가 그려진 지도에는 한반도와 대만에 굵고 붉은 선분이 해안가에 집중해 있음을 알 수 있다. 이 지도와 함께 사진집의 중반에는 다시 1970년도에 제작된 지도를 펼쳐든 사내들이 보인다. 간혹 사람들이 주제로, 배경으로 찍힌 사진들도 있고, 건물만 덩그러니 있는 사진이 반복해서 등장하기도 한다. 그러다가 풍경이 시원하게 펼쳐지기도 하고, 사물이 선명하게 드러나기도 한다. 풍경과 사람, 건물과 사물이 교차하면서 한 권의 사진책이 된 고정남의 『호남선』은 착란을 일으키기에 충분하다. 파편적인 이미지들, 맥락이 없어 보이는 오브제와 풍경은 친절한 서사를 기대했던 독자들에게는 다소 불편하고 당혹감을 안겨줄 것이다. 거기에 대개의 사진들이 심심하고 단순하고 심지어 구도가 삐딱하게 치우쳐 있어서 작가의 의도를 캐내기란 여간 심난한 것이 아니다. 첫 번째 사진인 '지도'가 없었다면 이 책을 볼 때 어떤 노선을 경유해야 할지 난해하기만 하다.

고정남은 『호남선』에서 하나의 루트를 제시하지 않는다. 사진가, 여행자, 산보객, 수집가로서의 다양한 그의 역할만큼이나 이 사진집에는 간혹 그의 여정을 알 수 있는 표식이 등장하고, 여행지에서 만났던 풍경과 건물과 사람들, 그리고 산보를 하며 수집했던 사물들이 각각의 사연을 안고 있기에, 사진집은 순차적으로 넘기며 봐야겠지만 책을 덮고 난 후에는 밤하늘의 별들을 이어가며 별자리를 헤아리듯, 다시 눈을 감고 사진-지도를 만들어야 사진집 '읽기'의 여정을 비로소 마칠 수 있다. 고정남은 언제나 동인천의 집에서 출발하여 기차와 버스를 갈아타고 '호남선'이 닿는 마을들을 순서 없이 찾아가 며칠씩 머물며 사진을 촬영한 후에 다시 집으로 오는 것으로 여정을 마친다. 집으로 돌아오기 위해, 그는 자신의 영토를 끊임없이 떠났다! 그 길 위에서, 당도한 마을 안에서, 마을을 조망할 수 있는 높은 언덕 위에서, 혹은 땅에 바짝 엎드려 찍어낸 사진들은 대부분 소소하지만 기념비적인 것이다. 수집가로서 고정남의 각별한 취향은 바로 '소소한데 기념비적인 것'을 발굴하는데 있다. 수집한 오브제를 계속 만지작거리며 예의 호기심 가득한 눈으로 키득대며 바라봤을 것이다. 여행자로서 고정남이 찍은 사진들은 별다른 목적도 의도도 없어 보인다. 크게 고생하고 고뇌에 차서 찍은 사진도 아닌 것 같다. 하지만 촬영을 위해 되도록 느리게 걷고, 한 장소에 오래도록 머물며 배회하고, 이미 사라진 풍경이나 사라지기 시작한 풍경 앞에서 쩔쩔맸을 표정도 그려진다. 세계의 혼돈 자체를 끌어안고 있으면서도 경쾌하고 얽매임 없는 이 사진가의 몸짓은 언제나 엄격한 절제미를 기본으로 하기에, 그의 사진은 다루기 어려운 유리조각 같았다. 고정남이 2010년부터 현재까지 사진으로 읊조린 「Song of Arirang」연작이 유리 파편처럼 투명하고 민감한 것은 '아리랑'이라는 제도적이고 선험적인 인식틀이 논리적 질서를 따른 것이 아니라, 고정남 특유의 형상적 질서로 구성되어 있기 때문이다. 언어로 잘 환원되지 않는 이 이미지의 질서를 파악하기란 어려운 일이다. 「Song of Arirang - 호남선」연작 또한 해석하려는 욕망 앞에서는 진실을 보여주지 않는다. 다만 배회하면서 언어의 권능을 일정 정도 포기해야하는 과제를 안겨줄 뿐이다.

 

흔들리는 시선, 희미한 사진

주지하다시피 고정남이 일본 유학 후에 한국에서 본격적으로 진행한 「Song of Arirang」연작은 '아리랑'에 의해 촉발된 감각과 관심으로 이뤄진 상징적 의미공간이자 작가의 내부에 깃들인 존재의 표현형식이라고 할 수 있다. 그에게 사진을 촬영하는 일은, 작가의 마음속에 들어온 외부의 풍경을 사유하고 있는 자신을 발견해 가는 길에 다름 아니고, 풍경을 이상화하거나 대상화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경험을 통해 풍경의 진실을 표상하는 일이다. 독일의 낭만주의자들이 예술을 자기인식을 가능케 하는 성찰의 매개로 삼았듯이 그에게 풍경은 내/외부의 프레임이 혼융된 상태라고 할 수 있다. 그렇기 때문에 더욱 중요한 것이 엄밀한 관찰이었을 것이다. 한국에 돌아와서도 가장 먼저 눈에 띈 풍경이 바로 곳곳에 남아 있는 적산가옥이었고, 그것은 단순한 미학적 감상의 대상이 아니라 작가가 세계를 해석하고 이해하고 구성하는 일종의 영상적 구축물이 된다. 사진에서 리얼리티라고 하는 것은 여러 차원이 있고, 저마다 자기의 사유, 경험에 따라 리얼리티는 다르게 정의 내려질 수 있다. 『호남선』은 고정남의 지각과 경험이 독자적으로 조직되어 주체의 인식이 만들어낸 산물이다.

'호남선'을 따라가는 고정남의 시각은 일정하게 틀 지워지지 않고 흔들린다. 물리적인 시점이 다양하고, 계절과 장소도 다르다. 때로는 기차 안에서 창밖의 파노라마가 펼쳐지는가 하면, 군산 어디쯤에 위치한 역사(驛舍)는 한 낮의 태양아래 파사드(fasade)를 무료하게 내보이고, 어떤 적산가옥은 세부가 낱낱이 드러나 더 이상 보기를 멈추게 한다. 사진의 배경이자 주제가 되는 풍경의 관계에서 서사가 파생되는 경우도 있지만, 3차원의 공간이 2차원의 평면으로 번역되면서 프레이밍 될 수밖에 없는 사진도 있다. 광활한 호남평야가 형태가 사라지고 색으로만 제시될 때는 작가가 풍경을 온몸으로 체험하고 대지의 호흡에 일체되는 일종의 의식이 보이기도 한다. 그런가하면, 작가의 양가적인 시각이 교차하는 사진들도 있는데, 제국적인 시각과 비제국적인 시각이 양립할 때이다. 여기에는 이중의 판타지가 작동하는데, 정복의 대상이 된 풍경을 바라보는 시선과 감싸주어야 할 연민의 대상을 바라보는 시선이 그것이다. 일제의 식민지가 된 풍경과 삶의 터전으로서 고국을 바라보는 시선, 식민지의 기억을 안고 제국으로 유학을 다녀온 후 다시 바라본 고국의 산천은 서로에게 데쟈뷰이자 서로의 프레임이기도 하다. 이 두 개의 프레임은 간혹 고정남의 사진에서 격자(格子)로 제시되기도 하지만, 이 함정에서 벗어나 다른 풍경을 생산해내기 위해 이제까지 알고, 봐왔던 것들을 지우려는 노력도 보이기도 한다. 그의 사진이 심심하고 단순해지는 지점이 바로 이 함정에서 자유로워지려는 고정남만의 경쾌한 프레임이 형성될 때이다. 사진가-주체의 일방적인 시선을 거두고, 풍경(대상)과 시선을 나누고 공명하려고 할 때 생성되는 새로운 차원인데, 사진을 촬영한다는 것이 어쩔 수 없이 눈으로 무언가를 점령한다는 소유의 개념과 밀접한 연관이 있다면, 어쩌면 이를 포기할 때 겨우 획득되어지는 희미한 욕망-긴장감 같은 것이다. 이처럼 고정남의 사진이 흥미로운 것은, 아무것도 '미화'하려 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의 사진이 표상하는 것은 그냥 그렇게 살아가는 사람들, 생산되는 삶일 뿐이다. 그저 살아지는 삶처럼 살아나는 예술. 추하지도 아름답지도 않게 일부러 예술화하지도 않고 그냥 내버려둔 것 같은 사진들. 버려진 것들과 파편적인 자료들을 해체하고 재구성함으로써 모자이크처럼 조직된 호남선의 얼굴을 다만 제시할 뿐이다. 고정남의 이러한 전략은 기왕에 존재하는 '사진읽기'의 방법의 치명적 결락을 보여준다. 특정 시대의 역사를 일종의 암호로 제시하며, 도식과 체계를 거부하는 사유의 이미지인 것이다.

 

 

예술로 역사를 말하는 어떤 한 방식

이광수 (부산외국어대 교수. 사진비평가)

 

‘역사’란 지나간 과거이기도 하고, 그 지나간 과거를 기록해 놓은 것이기도 하다. 전자에 있어서는 이견이 없지만 후자에 있어서는 그 성격과 방법론에 대해 끊임없이 논쟁이 이어져 오고 있다. 기록으로서의 역사란 인간을 중심으로 과거의 여러 사실(事實)들 가운데 일부를 취사선택하는 일이다. 그 기록을 하는 사람의 기준이 따를 수밖에 없으니 애초에 절대적 객관성이란 불가능한 것이다. 기록자는 여러 사실들 가운데서 자신이 판단할 때 역사적 가치가 있다고 하는 것들을 골라 사실(史實)로 선택해 시간적 순서에 따라 재구성한다. 이때 대부분의 역사가는 주어진 사료를 종합적으로 이해하고 검증하고 판단하는 일련의 과정을 거친 후 논리적으로 서사를 구축 하여 재구성한다.

문제는 여기에서 발생할 수 있다. 모든 사람이 동일하게 가치 부여를 할 수 있는 건 있을 수 없다. 설사 그런 것이 있다손 치더라도 다수의 가치가 어떤 특정인 소수의 가치보다 더 우월하거나 우선해야 한다고 평가할 수는 없다. 또 아무리 논리적으로 재구성한다 할지라도 그것이 분명한 인과 관계를 설명하는 과학과 같을 수 없는 것은 분명하다. 그래서 역사의 재구성을 반드시 이성과 산문으로만 해야 한다는 말에 대해 토를 다는 사람들이 생긴다. 왜 감성과 시(詩)로는 할 수 없다는 말인가? 이런 몇 가지 점을 고려해 볼 때, 지금까지 우리에게 널리 인정되어 온 ‘역사’는 여러 역사들 가운데 그저 어떤 하나일 수밖에 없다. 이 사실은 어떤 특정 개인이 갖는 혹은 그에게만 해당하는 어떤 역사성이 존재한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다. 특정 개인에게만 해당되는 역사성. 그 위에서 재구성하는 역사는 결국 예술의 태도와 가까워진다. 객관적 사실로부터 멀어지고 주관적 감성의 해석을 향해 가는 것이다. 당연히 널리 일반적으로 공유될 수 없는, 나만의 예술 방식으로 말하는 역사다.

사진가 고정남이 ‘호남선’이라는 제목으로 묶은 수 십장의 사진으로 과거 일제 강점기 역사를 말하는 것이 이러한 역사다. 그는 일제 강점기 때로 거슬러 올라갔다가 어렸을 적을 지나 현재에 이르는 역사를 말하고자 한다. 기억의 흐름 위에서 하는 재구성이다. 그 안에서 고정남은 국가나 민족 혹은 사회라는 거시의 틀도 중요하지만 '나'의 관점도 중요하다는 사실을 말하려 한다. 그 안에서 거시가 아닌 일상의 미시를 말하는 것이 하찮은 것이 되지 않는다. 글로 하는 기록이라 할지라도 정치와 사회 변동을 기록한 것은 가치 있는 일이고, 사고와 관념 혹은 손에 쥘 수 없는 어떤 세계를 기록한 것은 기록으로서 가치가 떨어진다고도 할 수 없다. 역사를 말하려 함에 있어서 중요한 것은 '나'는 어떤 역사를, 어떤 방식으로 기록할 것인가의 문제일 뿐 어떤 것이 어떤 것보다 더 정확하고, 의미 있는 가치를 갖는가에 대한 평가를 할 수 없다. 바로 이 점에서 사진이라는 예술로 말하는 고정남이 하는 역사 말하기의 개념이 성립한다.

어차피 소위 이성과 객관을 바탕으로 산문이나 수치를 이용하여 쓰는 과학적 기록의 관점이라 할지라도 모든 시간과 장소와 대상에 대한 것을 다 기록할 수는 없다. 과학과 통계라는 아주 촘촘한 그물코의 힘을 빌린다 할지라도 그 그물코 사이로 빠져나가 버리는 그 개인들의 ‘하찮은’ 과거는 많을 수밖에 없다. 이들이 누락되지 않도록 막을 수 있는 장치는 있을 수 없다. 글이 아닌 기록적 다큐멘터리 사진으로 하는 역사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사진가란 좋은 미장센의 이미지를 만들어낼 수 있는 여러 조건이 만들어질 때 셔터를 누르는 법이기 때문에 결국 그 사진이라는 것은 고작 장면이 될 만한 곳 혹은 소재를 찾아다니면서 이른바 채집을 한 순간의 재현일 뿐이다. 그러니 모든 장면을 그것도 사진가의 관점이나 느낌을 배제한 채 객관적인 이미지를 만들 수도 없고, 그것들로 객관적이고 과학적인 기록을 남길 수도 없는 것이다.

고정남의 ‘호남선’ 작업이 사진으로 말하는 역사가 되는 것은 그가 보는 과거가 궁극적으로 기억의 문제이기 때문이다. 기억이란 주체와 객관적 현실 사이에 존재하는 해석이다. 기억은 드러나지 않고 알려지지 않은 것을 드러내고 알리는 것이다. 그것은 구전과 함께 사료의 중요한 형태 가운데 하나임에는 분명하나 그것을 드러내는 주체에 따라 다양하게 나타나고, 그 인과 관계나 전개 과정이 일정하지 않아 모호하고 부정확하기 때문에 그 동안 널리 받아들여진 단일화되고 표준화된 역사로부터는 거부당해 왔다. 그래서 기억은 비(非)근대적인 것이고 비(非)체계적이며 비(非)과학적이다. 역사를 이성과 객관의 차원에서 본다면 기억은 분명히 비(非)역사적이다. 나아가 그 단일화되고 표준화된 역사가 문명의 소산이라는 점에서 보면 기억은 문화의 문제이기도 하고, 문명과 대척점에 서있는 폭력의 문제이기도 하다. 문화는 우(優)와 열(劣)을 구분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그리고 해석의 문제라는 점에서 여러 개인의 ‘역사들’을 복원하는데 필요하다는 차원에서의 의미다. 이 점에서 문화는 다시 폭력의 문제로 연결된다. 폭력은 근대성으로 표준화된 하나의 ‘역사’로부터 배제된 자들의 감성과 관련된다. 공공성이라는 이유 아래 배제되어 버린 개개의 이질적이고 감성적인 기억들은 폭력의 관점에서 끌어올리면 또 하나의 역사가 될 수 있다. 그것이 바로 기억의 역사다.

기억은 문화적 맥락에서 의미화의 과정을 거치면서 만들어진다. 다시 말하면 기억은 이미지, 의례, 기념물, 박물관 등을 통해서 유지된다. 그래서 매체의 영향을 받지 않은 기억이란 존재할 수 없다. 이 점에서 사진은 본질적으로 시간의 어느 한 순간을 포착해놓은 것이기 때문에 즉 객관적 맥락과 단절되거나 은닉되기 때문에 기억으로 끌어올리는 역사의 작업에 적절하게 사용될 수 있다. 사진은 본래 인간이 직접적으로 개입하지 못한 상태에서 카메라라는 기계에 의해 만들어진 이미지다. 그래서 그 이미지 혼자로서는 아무 말도 분명하게 할 수 없는 매체다. 사진은 그것을 읽는 사람의 경험이나 지식 혹은 이념에 따라 그 느낌과 의미가 달리 생성되는 매체다. 그 어떤 시각 이미지보다 해석의 여지가 더 넓어서 이질적이고 불규칙적인 기억을 자의적으로 소유하거나 전유할 수 있는 여지가 크다. 그래서 사진은 개인에 따라, 상황에 따라 달리 나타나는 아픔, 분노, 연민, 그리움과 같은 특유의 감성을 자아내게 하는 힘이 강하다.

이런 담론 위에서 과거를 ‘호남선’이라는 일제 강점의 특정 주제로 말하고자 하면서 일부러 맥락을 단절시켜버리고 각 이미지에서 여러 사실성은 은닉해버리고 나아가 각자의 감성에 따라 달리 해석될 수 있는 여러 상징물을 지뢰처럼 숨겨놓는 그러면서 어떤 정해진 내러티브를 구성하지 않는 방식이라면, 그것은 예술로 역사를 말하는 사진가 그 혼자만의 방식이 된다. 그래서 고정남의 ‘호남선’을 읽는 방식은 수백 수천 가지를 넘어서 무한대로 있을 수 있다. 한 때 호남 지역에 있었던 일본 제국 지배자들의 수탈에 대해 말을 하되, 그 전개는 사진가가 개인적으로 갖는 어렸을 적 동네에서 함께 자란 ‘적산가옥’을 매개로 하여 일본 유학을 갔을 때와 돌아 온 이후 대학 시절 몸담았던 반미 자주 통일 농학 연대의 기억들이 물고기가 헤엄치듯 마음대로 자유롭게 다닌다. 그래서 이 사진을 읽는 사람은 굳이 사진가의 의도만을 따라 갈 필요도 없고, 그럴 수도 없다. 사진가 고정남이 말하고자 하는 것은 자신이 예술로 역사를 말하고자 하는 특정한 한 방식일 뿐이다. 그가 그렇게 하듯, 독자들도 자기 마음대로 해석을 하고 느낌을 가지면 될 일이다. 사진가는 세 자루의 낫을 통해 김남주 시인의 주인의 목을 딴 종을 말하고자 했겠지만, 독자는 꼭 그렇게만 읽을 필요는 없다. 낫 속에서 돌아가신 할아버지를 떠올릴 수도 있고, 읍내에서 농기구 장사를 했던 자신의 어린 시절을 기억할 수도 있다. 독자에 따라서 정도의 차이는 있겠지만 일제강점기의 빛바랜 사진, 철로, 지도, 오래된 악보, 카메라를 든 사람들, 근대문화유산이 된 역사(驛舍)들, 적산가옥, 논과 밭, 지평선 등 비교적 쉽게 사진가의 의도를 알아차릴 수 있는 사진들도 있지만, 어떤 식당에서 이야기 나누는 사람들, 그냥 어딘가에서 서 있는 사람 등 사진가가 숨겨놓은 상징과 복선을 알아차리기가 쉽지 않은 것들도 있다. 그 해석과 느낌 사이에서 독자로서 마음껏 헤엄치는 자유, 그것을 만끽하는 것이 고정남 사진 읽기의 길이다. 지금, 예술로 역사를 말하는 어떤 사진가의 불친절한 세계, 그 앞에 사진하는 사람들이 숨죽이면서 서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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